아무리 생각해도 '멘붕'이란 말은 참 잘 만들었다. 영어 멘탈과 한자어 붕괴를 합쳤다는데 어떤 상황인지 머릿속에서 깨끗이 정리된다. 비슷한 경우에 쓰곤 하던 '패닉'과 비교하면 위풍당당하기 이를 데 없다. 인터넷 게임을 즐기던 이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승산이 없을 때 내뱉던 탄식이라거나 내기 골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하던 은어라거나. 설이 분분한데 유래는 분명치 않다. 어느덧 이 말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타고 순식간에 퍼져 국민 유행어가 됐다.
나 자신을 포함해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까지도 아무 거부감 없이 예사로 이 말을 '뿜는' 걸 보면 신기하다. 아는 사람들에게 '오늘 멘붕. 하악하악'과 같은 문자 메시지를 거리낌 없이 보내는 스스로가 낯설고 한편으론 께름칙하다.
10대와 젊은 층이 주로 사용하던 통신 언어가 그들만의 세계에서 뛰쳐나와 제도권으로 진입했을 때 우리 사회가, 그리고 내가 보였던 반응을 돌아보면 당연한 일이다. 초등학생이 제출한 일기에서, 대학생이 낸 과제물에서 정체 모를 약어와 이모티콘(컴퓨터나 휴대전화의 문자와 기호, 숫자 등을 조합하여 만든 그림문자)을 발견했을 때 기성세대는 말 그대로 경기를 일으켰다. 핀란드에서 세계 최초로 문자 메시지 전송을 시작한 해가 1992년께이고, 지구촌이 이 기술을 본격 상용화한 해가 2001년이니 통신 언어가 기성세대의 눈에 밟히게 된 것은 겨우 몇 년 사이의 일이다.
그 짧은 세월 동안 젊은 층이 발명한 이 언어는 배터지게 욕을 먹었다. 세종대왕이 애써 만든 한글을 다 망가뜨린다느니, 몇 년 안 가서 젊은 세대는 나이 든 세대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지껄일 것이라느니, 학사는 물론이고 박사 논문에까지 국적 불명의 약어와 이모티콘이 넘쳐나게 될 것이라느니. 이 언어에는 신랄한 비난과 저주가 쏟아졌고 나 역시 그런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까닭인지 고작 2년 전만 해도 누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영 불편했다. 내용을 읽고 문자로 답하는 대신 언제나 직접 전화를 걸어야 직성이 풀렸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이 든 축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말 그대로 반전이다. 1년 전만 해도 자판을 숫자로 바꾸는 것도 힘들어 더듬더듬했는데 어느덧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 중요한 일과가 됐다. 주변을 둘러봐도 이제 문자를 받고 직접 전화를 거는 '몰지각한 인사'는 발견하기 어렵다. 써보니 무엇보다 싸고, 쉽고, 편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 한쪽은 여전히 무겁다. 홀린 듯 자판을 누르며 낄낄대다가도 문자 메시지 언어를 둘러싼 숱한 불길한 예언이 머리를 맴돌아서다. 그 예언 중 한 가지라도 현실이 된다면 우리의 언어 생활은 예측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영국 웨일스 대학 언어학과 명예교수인 데이비드 크리스털이 쓴 < 문자 메시지는 언어의 재앙일까? 진화일까? > (알마 펴냄, 2011년)는 우리의 그 같은 불안에 답하는 책이다. 이 책에는 'txting the gr8 db8'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영어권 문자 메시지 사용자들은 ate 대신 숫자 8을 붙이곤 하는데 번역하면 '문자 메시지 대토론'쯤 되겠다. 본격적으로 문자 메시지를 다룬 책으로는 유일무이한 것으로 안다.
이 책을 보면 영미권에서도 통신 언어를 처음 접했을 때 한국 못지않은 대소동이 일어났다. 저자에 따르면 이렇게 짧은 시간에 호기심과 의심·공포·혼란·반대·흥분·열정을 일으킨 현상은 일찍이 없었다. 문자 메시지 언어는 마녀처럼 사냥당했다. 2007년 영국의 방송인 존 험프리스는 일간지 < 데일리 메일 > 에 실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열변을 토했다.
"800년 전 칭기즈칸이 이웃 나라를 약탈한 것처럼 문자 메시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언어를 해치고 있다. 그들은 구두법을 노략질하고 야만적인 문장을 사용하는 언어 파괴자들이다."
인쇄술도 처음에 '악마의 작품' 취급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주로 언론이 만들어낸 이 같은 종말론은 미신이다. 중세에 인쇄술이 처음 나왔을 때도 사람들은 악마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문자 메시지를 적극 사용하는 청소년이 문자 해득 능력도 높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온다. 약어나 이모티콘, 특이한 철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중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문자 메시지는 언어라는 바다의 표면에 일어난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문자 메시지 언어에는 '외래' '이질' '이국풍'이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 신기할 것도 없다. 영어 be를 b로, to를 2로, at를 @로, kiss를 x로 변형하거나 이모티콘을 즐겨 쓰는 것과 같은 방식은 고대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이집트와 중세 유럽에서도 다수의 지명과 의전 상징을 표현하는 데 이 같은 그림문자를 사용했다.
girlfriend를 gf로, no problem을 np, just kidding을 jk로 표기하는, 언어학에서 말하는 이니셜리즘도 그리 특이한 현상은 못 된다. NATO, BBC, FTA는 되고 어째서 gf는 안 된다는 건지 저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 밖에 첫 글자를 제외한 모든 문자를 생략하거나 중간을 잘라먹거나, 아예 모음을 탈락시키는 행위도 유럽에서 수백 년 전부터 즐겨온 말장난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다.
저자는 이제 사람들이 서서히 '문자 메시지는 나쁜 것'이라는 민간신앙에서 벗어나는 중이라고 말한다. 다른 언론 못지않게 문자 메시지 언어 헐뜯기에 앞장섰던 영국 일간지 < 가디언 > 은 뜻밖에도 2003년 문자 메시지로 시를 쓰는 대회를 세계 최초로 열었다. 이 대회에는 7500명이나 참가해 뜨겁게 경합했다. 예상 외로 출품작 다섯 편 중 세 편은 전혀 약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영어 철자법을 정확하게 지켰다. 특별상은 약어를 매력적으로 구사한 줄리아 버드에게 돌아갔는데 그녀는 '그가 나를 보고 웃는 순간 내 원자는 분열했다'(it splits my @oms / wen he :-)s @me.)라고 썼다.
얼마 안 있어 이 문자 메시지로 시 쓰기 경연대회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참가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으며 작품의 질 또한 몰라보게 높아졌다. 2007년 독일의 통신사가 세계 시의 날을 축하하기 위해 연 대회의 준우승자는 10대 소녀가 아닌 68세 할머니였다. 세대를 초월해 많은 사람이 문자 메시지가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영국 코벤트리 대학의 연구진이 2006년부터 2007년 사이에 진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문자 메시지 약어를 더 많이 사용한 아이가 읽기와 단어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핀란드 연구팀은 격식에서 벗어난 메시지를 쓰는 청소년이 언어학적인 독창성도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영국의 고등학교나 대학에 제출된 공식 과제물에서 심각할 정도로 많은 약어와 이모티콘을 발견했다는 보고는 없었다. 하루에도 약어와 이모티콘 수천 개가 태어나지만 태반은 곧 도태될 뿐이다. 해고나 이혼 통보에도 이용되지만 문자 메시지는 언어의 재앙이 아니라 진화라는 게 저자가 내린 결론이다. 인간은 언어유희 본능을 타고났고, 본능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ㅇㄷ, ㄱㅅ, ㅂㅅ, ㅂㅂ, 페마, 미피, 스벅, 금사빠, 답정넌말, 솔까말, 교카, 시망, 치느님, OTL, 7942….
인터넷에 이런 말이 횡행한다고 질색하거나 멘붕에 빠질 이유는 없다. 그러고 보니 문자 메시지만큼 억울한 누명을 많이 쓴 친구도 없다. ㅋㅋ
문정우 대기자 /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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